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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凝菴)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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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응암(凝菴)
  • 글자체 예서(隸書)
  • 크기 27.0x44.0x2.6
  • 건물명 응암(凝菴)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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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凝菴)

응암(凝菴)


응암(凝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건립한 고산정사(高山精舍) 실(室) 편액이다. ‘응암’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 “만일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모이지 않는다. [苟不至德 至道不凝焉]”에서 취한 말이다. 이상정은 「고산잡영高山雜詠」에서 “골짜기는 고암(高巖)이라 통칭하고 또 별도로 암산(巖山)이라 칭하는데, 마침내 이 둘을 합하여 고산(高山)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개 『시경』, 「소아小雅」의 ‘고산을 우러른다. [高山仰止]’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집은 총 3칸인데, 가운데 한 칸은 대청으로 만들어 정춘(靜春)이라 이름 하였으니, 정자(程子)의 말을 취한 것이다. 남쪽 방을 응암(凝菴)이라 하였으니, 『중용』 27장의 뜻을 취한 것이다. 주인이 자는 곳은 북쪽에 두었는데 이름을 낙재(樂齋)라 하였으니, 『논어』 첫째 장의 뜻을 취하여 장차 원근의 벗들이 오기를 기다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산서원은 1789년(정조 13) 사림의 공의로 옛 고산정사 터에 지은 서원이다. 1896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어 향사만 지내 오다가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와 동재를 중수하였다. 이때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함께 배향하였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의 예서체이다.

작은 크기의 편액에 납작한 예서를 썼다. 좌우 가로의 형세인 예서인 까닭에 좌우 글자간의 관계는 긴밀하고 상하 공간은 텅 비워둔 구성이다. 어디를 긴밀하게 하고 어디를 비워둘 것인가 하는 등의 선택, 즉 배치의 문제는 서사(書寫)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서예가는 글씨를 쓰고 디자이너는 글씨를 배치하겠다’는 류의 자세는 얼마나 무모한 일이던가? 테두리 장식이 없는 깔끔한 편액과 바탕 나무의 질감 그리고 차분한 글씨가 전체적으로 고요함을 만든다. 예서 자형도 전통적인 한예(漢隷)의 전형을 취하여 당시의 고법에 충실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이상정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관가재(觀稼齋)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딸이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13세에 벌써 『사서』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과 『맹자』를 수업하였다. 1747년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으로 옮겼으나 그해 휴가를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1751년(영조 27) 사단칠정설을 지었으며 1758년(영조 34) 『병명발휘屛銘發輝』를 지었다.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1759년(영조 35) 『주자어절朱子語節要』를 완성하였고 1767년(영조 43) 『계문제자록溪門諸子錄』을 편집하였으며 1770년(영조 46)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를 편찬하였다. 1771년(영조 47) 강령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임지로 가다가 병으로 귀환하였다. 1777년(정조 1)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1780년(정조 4)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다음 해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를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가 충주에서 병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여러 문생의 향후 수업을 동생 소산에게 맡기고 졸하였다. 고종(考終)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병이 심해지자 대산의 아우 소산 이광정이 울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대산이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후학들의 향상에 노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웃옷을 입히고 띠를 두르게 한 다음 말하기를 “평소에 강의하여 논의한 것들을 부디 착실히 공부하여 연마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며 이어 “이와 같은 일들은 다만 일상적인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이에게 명하여 요와 이불을 깨끗이 새로 깔게 하고는 붙들어 일으켜서 자리를 바꾸어 눕히게 하였다. 그런 뒤 이튿날 조용히 숨을 거두니 12월 9일(정축)이었다.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의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1802년(순조 2)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1882년(고종 19)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910년에 문경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 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불리었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졌다.

고산서원의 건립 과정을 살펴보면 1767년(영조 43) 이상정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사를 지었다. 1769년(영조 45) 정사를 언덕 중턱으로 옮기고 정사의 가운데 1칸을 마루로 꾸며 정춘헌이라 하고 실(室)은 남쪽을 응암, 북쪽을 낙재라 하였다. 1789(정조 13)년 강당을 건립하였다가 1827년(순조 27) 강당을 옮겼다. 옛 강당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다시 땅을 보아 조금 북서쪽으로 옮겨 오가오영(五架六楹)으로 왼쪽에 방을 달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꾸몄다. 마루는 호인당이다. 1828년(순조 28) 5월 강당 앞 왼편에 앙지재를 지었으며, 1844년(헌종 10) 재실 맞은편에 장판각을 지어 문집과 책의 판목을 갈무리하고 문하 여러 제자의 판본도 아울러 여기에 수장하였다. 1857년(철종 8) 경행사를 짓고 9월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였고, 1984년과 1985년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하였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 소산 이광정을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 『주자대전』
  • 『대산집』
  •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의 명현당호2』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